전체 글26 신의 은총으로 은폐되는 진실 영화 후기 얼마 전, 신년미사를 마치고 군중들과 인사를 나누던 교황이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이 뉴스를 탔다. 교황과 악수하기 위해 늘어선 군중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교황의 손을 무례하게 낚아챘기 때문. 이 모습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교황은 다음 날 사과의 메시지를 냈다. “우리는 자주 인내심을 잃으며 나조차 그렇다. 어제 있었던 나쁜 본보기에 대해 사과한다” 성의를 입고 있지만 알고보면 교황도 나약한 인간이다. 제례를 주관하는 제사장에게 신성을 기대해서는 안될 터. 성직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수도 없는 신의 섭리를 대리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곧잘 그 사실을 잊곤 한다. 화도내고 실수도 하는 존재지만 교황(사제)이 위대해 보이는 건 법관이 위대해 보이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연혁적으.. 2021. 11. 19. 왜 그림 그려요?-2 인상적인 장면을 보면 그 순간을 남기고 싶다. 대단치 않은 일상의 풍경도 때에 따라 마음을 잡아끌곤 하지 않나. 사람들이 멀쩡하게 갈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 이유도 그렇다. 눈길이 발길을 잡아끄는 것이다. 그렇게 담긴 사진은 기억에 남지 않아도 앨범 어딘가에 남는다. 필요할때 찾아볼 수 있는 어딘가에 그 순간을 남길수 있다는 것. 순간을 남긴다는 건 시간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움켜잡고 싶은게 어디 순간 뿐이겠냐만, 우리는 헛된 욕심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림은 찰라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오랜 시행착오 끝에 개발된 기술이다. 사진도 그렇지만 그림은 사진에 비해 더 집요하게 한 순간을 잡아맨다. 그림은 집요한 욕심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신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순간을 소유(한다는.. 2021. 11. 18. 존재를 이탈한 욕망의 파국 영화 후기 돈은 수단이다. 수많은 욕망과 재화를 연결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는 이상 돈은 그저 종이조각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돈은 정말 수단일 뿐일까? 스스로는 종이 한장의 가치밖에 안되지만 돈은 언제부터인가 다른 모든 사물이 저마다 가지는 가치의 총합을 넘어서는 의미가 되었다. 다르게 말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집약해서 일체화시킨 결과물이 바로 돈이다. 돈은 수단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으며 세상 모든 곳에서 동일한 뜻으로 존재함으로써 신과 동급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박해의 벼랑끝에서 신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주었던 초기 교회의 순교자들처럼 삶의 벼랑끝에 내몰린 사람들은 돈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영화 도 그런 이야기다. . . 지푸라기는 튼튼한 동앗줄을 잡.. 2021. 11. 17. 두 남매가 보낸 여름의 기록 영화 후기 영화 에서 주인공 두 남매의 일상을 잡아내는 시선은 지극히 관조적이다. 카메라는 남매의 삶속으로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첫 장면부터 그렇다. 다세대 주택 지하 방에서 잠시 망설이는 옥주를 비추던 카메라는 옥주보다 한 템포 느리게 움직이며 옥주가 떠난 빈 공간의 여운을 잡아낸다. 카메라만 그런 건 아니다. 남매가 아빠를 따라 할아버지네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왜 고모는 갑자기 짐을 싸서 친정집으로 돌아왔는지 영화는 일일이 알려주지 않는다. 관객은 옥주를 비롯한 가족들의 표정을 읽으며 추측할 뿐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불편하지 않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사연들이겠거니 짐작하면 충분하다. 멀리 물러서서 느릿하게 여운을 주던 카메라가 역동적으로 변할 때가.. 2021. 11. 17.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프랜시스 베이컨 대담집) 가장 최근에 개봉한 이유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연기가 많은 이들의 기억을 지배하겠지만, 사실 그에 앞서 인간의 감정을 철저하게 배재한 히스레저의 조커가 있었고, 더 이전에는 익살스러우면서도 괴짜 예술가 느낌이 나는 잭 니컬슨의 조커가 있었다. 잭 니컬슨이 주연한 영화 에는 하루라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악당 조커가 고담시의 미술관으로 침입해 수많은 명화들을 파괴하는 장면이 나온다. 렘브란트, 드가, 르느와르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훼손하던 조커는 한 그림을 지나치며 자신의 부하에게 명령한다. “이 그림은 맘에 드는군, 남겨둬” 악의 화신 조커의 시선을 끈 작품은 다름아닌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미술과 친숙하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할 .. 2021. 11. 17.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 비 오는 아침, 종로2가. 낡은 여행 가방을 들고 서서 행인들에게 길을 묻는 사내가 있다. 허름한 차림에 거무스레한 피부, 움푹 들어간 눈에 짙은 눈썹을 가진 그는 누가 봐도 출근길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다. 독특한 악센트의 영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뜨악한 것은 그가 전형적인 영어권 국가의 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노란 곱슬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벽안의 서양인이었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거리에 서있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서양도 아니고 딱히 동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의 고국이 문제라면 문제랄까(우리의 인식 속에 동양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과 일본, 이 세 나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에게 어떤 범죄의 흔적이 느껴지거나 잘못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무시하거나 .. 2021. 11. 16.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