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상

감성변기의 최후

by 아르띠무너 2021. 11. 16.

 

 

생각해보니 변기는 단 한번도 울지 않았던 것 같다. 이사 온지 십년이 넘도록 자잘한 고장도 일으킨 적이 없었다.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온 세월이 억울했던건지 드디어 오늘 아침 웅-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처음엔 변기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낮은 중저음이었고 기계의 모터 따위가 돌아가는 소리 같았다. 비데의 전원이 켜있었기에 비데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플러그를 뽑은 후에도 소리는 계속되었다. 원인을 알수 없는 소리였기에 걱정이 되었지만 이렇다할 이유를 생각해낼수 없었다.

우는 변기라니.

감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나는 능숙한 배관공처럼 고개를 쑤셔박고 변기의 밑둥을 살폈다. 거기엔 말라비틀어진 비누조각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소리가 계속되자 점점 지하 이백미터쯤에 서식하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이 느껴졌다. 고층 아파트의 변기를 파고 내려가면 또 다른 가구의 변기가 아파트의 층수만큼 나타날게 뻔한데 울부짖는 짐승이라니. 이성적이지 않은 건 변기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좀 해봐.

아내가 애원하듯 날 쳐다보며 말했지만 그 어떻게엔 중요한 단서가 들어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이를테면 '돈을 들이지 않는 선에서' 정도의 조건이 그것이다. 지금 아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끔찍한 소리를 내는 변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두번째는 말도 안되는 상황으로부터 자신의 통장을 지키는 것이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겪어야 할 황당함이랄지 막막함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닌것이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아내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우리 집안에는 가장 이성적인 여자와 감성적인 변기 그리고 변기보다 더 울고 싶었던 남자가 함께 살고 있는 셈이지.

실용적 지식의 보고라는 네이버도 뾰족한 원인을 알려주지 않았다. 무언가 걸렸을 때 나는 소리일지 모른다는 어떤 지식인의 날카로운 해석이 있었지만 그 역시 해결책을 제시해주진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낮고 음울한 소리는 계속되었다. 십년이라는 시간 한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충직한 변기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막힌 것이 원인이라는 지식인의 지적에 나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가 그를 그토록 힘들게 한 것일까. 숨이 막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죽어가던 영화속 주인공이 떠올랐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저렇게 헐떡거리며 길게 대사를 치는 사람이 어디있어? 그땐 웃었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무언가 남길 말이 많지 않을까.

변기도 말야. 무언가 오래 참았을거야. 울음이라도 토해내고 싶었겠지.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올랐을거야. 울컥울컥 참아냈던 순간들이 얹혀있었을 뿐이라고. 그러니 이제 그만 보내주자. 조용히.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시끄럽더라도 지켜보자고. 그게 십년간 우리의 배설물을 묵묵히 받아내던 변기에 대한 예의라구.

 

 

반응형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녁이 있는 삶, 삶이 있는 저녁  (0) 2021.12.05
숨쉬듯 후회  (0) 2021.12.03
내 쉴 곳은 정말 내 집 뿐인가  (0) 2021.11.29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  (0) 2021.11.16
전단지 한 장의 무게  (0) 2021.11.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