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심원들 (홍승완, 2019)> 후기
판사는 성직자와 닮았다. 길고 검은 가운을 걸치고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점이 그렇다. 성전과 법정 역시 서로 비슷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모든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는 단상 위에서 판사와 성직자는 죄를 다스리고 때론 어둠에 갇힌 인간을 구원한다. 사법부, 특히 판사의 권위는 이러한 공간의 구조, 시선의 위계, 입장과 동시에 저절로 '기립'하게 되는 장엄한 세리모니 속에서 심판자의 그것과 동일시 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을 눈앞에 둔 18년차 김준겸 부장판사(문소리 분)는 처음 도입된 국민참여 재판의 재판장을 맡는다. 그녀는 배심원 후보자를 면담하며 훈시하듯 말한다.
“법이란 제멋대로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기준을 만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신의 음성 같이 사려 깊고 품위 있는 재판장의 모습에 비하면, 어리숙한 8번 배심원 권남우(박형식 분)는 당최 믿음이 가지 않는 존재다. 주부, 상인, 장의사, 학생 등 다른 배심원도 못미덥긴 마찬가지다. 자격증도 전문지식도 없는 그들에게 그나마 유일한 자격이 있다면 그건 ‘주권자’라는 것 뿐이다.
영화 <배심원들>은 지적 깊이도, 권위도 없는 평범한 시민들과 엘리트 중에서도 최정상이라 불리는 법조 엘리트(판사)를 진실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마련된 쟁투의 공간(법정)에서 대립시킨다.
예측을 벗어나는 축구경기에서 쾌감을 느끼듯, 관객은 평범한 배심원들이 복잡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형사재판 과정에서 예측을 벗어나 '한 방' 해주길 기대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기대는 실상 법이 '보편적 상식의 실현'이길 원하는 다수 국민의 기대와 다르지 않다.
반면, 언론과 법조계는 "첫 국민참여재판은 사법사적 전환점"이라며 요란을 떨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럴싸한 그림을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다. 권력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배심원단으로부터 의미 있는 평결이 나올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영화와 현실이 정확히 겹치는 부분이다.
기대와 의심 속에서 법정에 들어선 배심원들은 공소사실의 실체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유죄를 전제로 형량을 정하는데 배심원단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재판부의 의도가 먹히지 않는다. 잘 짜여진 한편의 연극과 같은 재판을 끝낸 후 "사법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권력이라는 걸 재확인하게 해준 의미의 재판"이라는 교과서적인 무대인사를 준비했던 재판장과 법조인들은 당황한다.
배심원들은 "몇 년 형이 적당하냐"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잘 모르겠다"는 의심의 단계를 거쳐 "유죄냐 무죄냐"라는 실체적 진실을 놓고 고민을 이어간다. 8번 배심원으로부터 시작된 의문은 '처음이라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인 배심원들에게 하나 둘 전염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최우수 엘리트들이 알아서 다 했을 것"이라는 안일한 패배주의는 전량 폐기된다. (포켓볼에서 8번공의 의미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배심원들의 "잘 모르겠다"는 태도는 모든 기록을 처음부터 샅샅이 뒤져보자는 의지로 뒤바뀐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확신할 수 없고 합리적 의심이 계속될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 결론을 내야 한다. 그게 법의 정신이다. 배심원들의 평결은 판결을 구속하지 않는 단순한 참고일 뿐이지만 재판장 김준겸 판사는 결국 흔들리고 만다.
재판을 다룬 영화치고는 감성적이다. 치밀한 법리 다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 모른다. 극의 전개를 위해서겠지만 과장되거나 진부한 설정도 눈에 거슬린다. (이를 테면, 살인죄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재판장이 직접 망치를 쥐어주고 휘둘러보라고 한다거나 재판부 앞에서 쌍욕을 내뱉던 소녀가 무죄를 받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펑펑 우는 장면이 그렇다.) 그래도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사법권 역시 국민이 부여한 권력이라는 원론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형사 재판은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러기에 '법'이 소수의 성역에 갇혀 진실과 정의를 외면할 때 인류가 발명해낸 인권보장의 체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심판자의 위치에 있는 사법관이 ‘인권’이라는 신앙을 저버려서는 안될 이유다.
오랜 세월 권력을 좆기 위해 신념을 내팽개친 법조인사와 그들이 만들어낸 부끄러운 사법의 민낯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에게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권력 감시와 참여가 왜 중요한지 생각할 기회를 주는 영화다. 법학개론이나 법과 인권 같은 교양과목 교재로 쓰기 적합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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